하나의 이미지가 도상을 바꾸고 매체를 가로질러 다시 현실 공간으로 돌아오다

작은 점들이 모여 형상을 이루고 수많은 입자가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생명이 된다. 권민진 작가는 오랫동안 한국화를 기반으로 생명의 생성과 변화, 기(氣)와 입자의 움직임을 탐구해 왔다. 꽃에서 원으로, 원에서 점과 입자로 다시 응집과 분산의 구조로 이어져 온 그의 작업은 최근 생성형 AI를 만나 새로운 형상과 매체로 확장되고 있다.
권민진 작가(MJ STUDIO)의 개인전 《생성의 장(Field of Generation)》이 2026년 9월 12일부터 17일까지 지음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한국화 원작에서 출발해 생성형 AI를 통한 도상의 변형, 한지 출력, 영상과 투명 레이어, 공간 설치와 증강현실(AR)로 이어지는 작업의 확장 과정을 보여준다.
권 작가에게 생성형 AI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작업 방식이 아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거친 그는 오랫동안 꽃과 원, 점과 입자를 통해 생명의 구조를 탐구해 왔다. 초기 작업은 꽃이라는 구체적인 생명 형상에서 시작됐지만 꽃의 복잡한 형태는 점차 원으로 축약됐고 원은 다시 점과 입자로 환원됐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점 자체보다 점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이었다. 입자의 응집과 분산, 반복되는 사각 프레임은 이후 그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관통하는 조형언어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다시 산수와 물, 도시와 건축 등의 구체적인 형상으로 이어졌고 추상적으로 탐구해 온 생명의 구조가 현실의 다양한 존재와 공간에서 어떻게 다시 형상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
생성형 AI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작업과 만난다. 권 작가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전혀 다른 그림을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오랫동안 손으로 만들어 온 화면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기존 작품의 색채와 구성, 점과 입자, 관계와 응집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AI를 통과한 이미지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변화시키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AI로 완전히 다른 그림을 만드는 것보다 제가 손으로 오랫동안 만들어 온 화면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 이미지가 AI를 통과하면서 무엇은 유지되고 무엇은 달라지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다른 형상과 매체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한 첫 번째 변화는 도상의 확장이다. 작가는 직접 그린 한국화에서 사용해 온 분홍색의 색채, 사각 프레임, 산수와 물결, 점과 입자 등의 기본적인 조형구조와 한국화적 성격을 가능한 한 유지하면서 생성형 AI를 통해 새로운 형상을 화면 안으로 불러들였다. 곰과 여성, 봉황, 해와 달, 폭포와 물결, 전통 건축과 현대 도시 등이 그 과정에서 등장한다. 일월과 산수, 봉황 등 전통적으로 생명과 지속, 이상세계를 상징해 온 이미지에 현대 도시와 미래적 건축이 결합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서로 다른 시간성이 하나의 화면 안에 중첩된다.
특히 곰은 기존 작업에서 점과 입자로 다루어 온 생명의 최소 단위를 구체적인 도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하나의 큰 곰 안에는 수많은 작은 곰들이 존재한다. 작은 곰은 각각 독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더 큰 전체를 이루는 작은 단위가 된다. 이는 기존 회화에서 지속해 온 ‘입자–관계–응집–형상’의 구조가 생성형 AI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곰은 AI를 통해 우연히 탄생한 캐릭터라기보다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점과 입자의 개념이 또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 결과에 가깝다.
권 작가의 실험은 새로운 도상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이미지 안에 무엇이 등장하는가를 넘어 이미지 자체가 어떤 물질과 표면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로 질문이 이동한다. 생성형 AI를 통해 자개와 나전, 진주와 보석, 금속과 유리 등 서로 다른 재료를 연상시키는 표면이 하나의 화면에 결합된다. 현실의 특정 재료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전통 공예의 물성, 현대적 재료의 표면과 미래적인 질감을 결합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물질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AI 이미지 안에서 금속과 보석, 자개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빛을 반사하고 돌출된 듯한 깊이를 갖는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입체성과 물질성은 다시 평면의 한지 위에 출력된다. 실제 물질로 시작한 한국화가 데이터가 되고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표면을 얻은 뒤 다시 한지라는 실제 물질 위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지의 섬유와 부드러운 표면 위에 디지털 이미지에서 생성된 빛과 반사, 그림자와 깊이가 중첩되면서 또 다른 화면이 만들어진다.
“실제 물질로 시작한 한국화가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 안에서 다시 가상의 물질성을 얻은 뒤 한지라는 실제 물질 위로 돌아옵니다. 저는 그 이동 과정 자체를 하나의 작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이동은 다시 영상으로 이어진다. 평면에 정지되어 있던 입자와 도상은 AI 영상에서 움직임과 시간을 얻는다. 작은 입자들이 나타나고 모이고 흩어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고 물과 빛이 흐르는 가운데 곰과 여성, 전통적 도상과 현대·미래의 이미지가 서로 연결된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이러한 생성의 구조가 한글로 확장된다. 모음과 자음이라는 작은 단위가 결합해 글자와 의미를 이루는 과정은 입자들이 관계를 맺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작가의 기존 작업 구조와 연결된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검과 열쇠 역시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읽힌다. 검과 열쇠는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가능성을 여는 행위의 상징이다. 생성형 AI에서 프롬프트와 조건 설정이 결과의 방향에 개입하듯 선택과 조건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을 시각화한다. 영상 제작을 위해 생성한 연속 이미지들은 다시 그림책의 장면으로 재구성됐다. 영상에서는 이미지가 움직임과 시간을 얻고 그림책에서는 장면의 선택과 페이지의 순서를 통해 또 다른 서사가 형성된다. 하나의 이미지가 정지 이미지와 영상, 그림책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과하면서 각각 다른 시간성과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시 실제 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전시장에는 권 작가가 직접 제작한 대형 한국화 원작이 중심에 놓이고, 그 주변에는 원작의 조형구조를 바탕으로 생성형 AI를 통해 도상과 표면을 변화시킨 한지 작품들이 서로 다른 크기와 간격으로 배치된다. 작품 사이에는 금색과 분홍색의 실이 관계를 만들고, 기존 회화에서 반복되어 온 점과 입자는 작은 원형 금속으로 물질화된다. 벽면에 놓인 금속 입자들은 일부 바닥까지 흘러내리듯 이어지면서 평면 속에 머물렀던 응집과 분산의 구조를 실제 공간으로 끌어낸다.

AI를 통해 등장한 곰 등의 도상은 투명 OHP 필름에도 출력된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원작과 한지 작품, 투명 이미지와 금속 입자들이 서로 겹치고 분리되면서 하나의 고정된 화면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관계를 만든다. 여기에 증강현실(AR)이 더해진다. 작품 속 곰 캐릭터는 평면 이미지에서 3차원의 가상 존재로 전환되고 관객이 스마트폰을 통해 AR을 실행하면 검과 열쇠를 든 곰이 실제 전시장 공간 위에 나타난다. 회화 안에서 출발한 도상이 한지와 투명 필름을 거쳐 실제 공간으로 이동하고 다시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 공간과 중첩되는 것이다.
평면 이미지에서 일어났던 응집과 분산, 중첩과 변형은 전시장에서는 거리와 투명도, 빛과 그림자, 관객의 시점으로 다시 구성된다. 결국 하나의 원작에서 시작된 변화가 작품 내부에 머물지 않고 전시 공간의 구성 원리로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전시 제목 《생성의 장》에서 ‘장(場)’은 하나의 완성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 권 작가가 오랫동안 회화에서 탐구해 온 점과 입자는 서로 관계를 맺고 응집과 분산을 반복하면서 형상을 만들어왔다. 생성형 AI 역시 데이터와 조건,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와 언어를 만들어낸다. 두 과정이 동일한 원리인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작은 단위와 관계에서 이전과 다른 형상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탐구해 온 생성의 조형구조와 AI를 새롭게 연결해 바라볼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의 작업에는 동아시아의 기(氣)에 대한 사유와 자연에서 관찰한 생명의 순환 역시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한다. 산수와 물, 해와 달, 봉황과 십장생 등의 전통적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인간이 오랫동안 생명과 지속, 순환과 이상세계를 상상해 온 시각적 상징들이다. 여기에 현대 도시와 미래적 건축, 데이터와 AI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과거의 자연관과 오늘날의 기술 환경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나게 된다. 전통과 기술, 자연과 데이터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면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며 또 다른 이미지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생성형 AI는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권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생성된 이미지의 양이나 화려함이 아니다. 기존 작업에서 오랫동안 다루어 온 생명, 입자, 응집과 분산, 사각 프레임 등의 조형구조가 유지되는지를 살피고, 생성된 결과 가운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판단한다. 조건을 다시 설정하고 이미지를 수정하며, 그것을 한지와 영상, 설치와 AR 등 다른 매체로 이동시키는 과정 역시 작업에 포함된다.
“AI가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준다는 사실보다 그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방향으로 다시 변화시킬 것인가가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계속해서 작가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의 장》은 ‘AI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술 시연과는 거리를 둔다. 오히려 한 작가가 오랫동안 구축해 온 조형언어가 새로운 기술을 통과하면서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에 가깝다. 권민진 작가의 작업은 한국화와 AI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들어 온 한국화의 조형구조를 출발점으로 그것이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통과할 때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한국화에서 시작한 하나의 점은 입자가 되고, 입자는 AI를 통해 새로운 형상을 얻는다. 이미지는 다시 한지 위로 돌아오고, 영상에서는 시간을 얻으며, 전시장에서는 실제 공간으로 확장된다. 변화하는 것은 형상과 매체이지만 그 아래에는 하나의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작은 단위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 하나의 생명과 형상을 이루는가. 그리고 이미 형성된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조건과 매체, 공간을 통과하면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전통과 AI, 손작업과 디지털, 현실과 가상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작업 안에서 계속 관계 맺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생성의 장》은 변화의 결과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형상을 바꾸고 매체를 가로지르며 현실과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생성의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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